창세기 1장(2)–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재만, ACT뉴스 2013년 7월
성경의 첫 구절이며,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첫 행위다. 모든 것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창조하셨다. 태초(beginning)라고 하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하늘(heaven)이라는 공간과 첫 번째 물질로 지구(earth)가 창조된 것이다. 이 시간-공간-물질을 동시에 창조하신 것 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시공간 속에 있는 물질”이라고 표현한다. 시간-공간-물질 이 세 가지를 항상 동시에 표현하며, 이는 이 세 가지를 각각 구분해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창세기 1장 1절은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휴가를 다녀오면서 ‘다시 집에 돌아왔구나’라고 말을 했다고 하자. 그러나 따져보면 이는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다. 이미 시간이 지나갔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했기 때문에 공간도 이미 바뀌었다. 또한 그 사이 공기도 바뀌었고 집도 부식되었고… 결국 물질도 이전과는 다르다. 돌아왔다기 보다 여전히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들도 시공간과 물질은 분리될 수 없고 항상 같이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시간 매초마다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성경은 여느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회를 거부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와 같이 인생과 역사는 단 하나며 원(圓)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직선이다. 그리고 성경은 1절을 통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인생길을 이 창조주와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혼자 갈 것인가 묻는다. 이 분만이 우리 인생의 구원자인가? 그렇다. 이 창조자 외에는 어떤 자도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일까?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시간을 초월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창조하신 분은 시간을 초월한 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이라고 부른다. 즉 시간도 피조물이다. 그런 면에서 바울 사도가 피조물들을 나열하며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6)라고 기록한 것은 시간도 피조물이며 우리를 향한 시간을 초월하신 전능하신 분의 전능하신 사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공간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공간 역시 아무도 초월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공간의 창조자는 공간을 초월하신 분임에 틀림없으며, 그 분을 무소부재 하신 분이라고 부른다.
공간이란 과학자에게 참으로 어려운 연구의 대상이다. 우리 몸에서 공간을 모두 제외시킨다면 그 부피가 어느 정도일까? 바늘 끝 안에 다 들어가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 몸은 분자로 되어있고 분자는 원자로 되어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원자는 핵과 전자로 되어있는데, 이 둘은 부피를 거의 차지하지 않고 99.9999…는 공간이 차지한다. 즉 몸의 거의 전부는 공간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몸뿐 아니라 모든 물질들은 분자로 되어있으므로 이들도 대부분은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런데 몸도 공간, 벽도 공간이므로 서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부딪히면 머리에 혹이 나버린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과 무엇이 부딪힌 것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물질과 물질이 아니라 공간의 힘과 공간의 힘이 부딪힌 것이다. 분자와 분자, 핵과 전자, 핵 속의 소립자와 미립자들 사이에서 서로 당기는 공간에 존재하는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을 분리시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단지 핵과 전자뿐 아니라 모든 물질들은 만유인력이라는 서로 당기는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와 같이 질문하셨다.
“누가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정말 놀라운 질문 아닌가? 이미 처음부터 공간 안에 서로 달라붙게 하는 성질을 넣었다는 말씀이다. 만약 인력이란 것을 처음부터 창조하지 않았다면 어떨까? 물질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선 바로 그 질문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물질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역시 알 길이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미 물질이지 않은가? 우리는 한 시도 물질을 초월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시간-공간-물질을 그것도 동시에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며,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한 분이며, 불가능한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창세기의 첫 구절은 우리에게 바로 그 창조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창조자가 우리의 구원자일까? 그렇다. 과연 이분 이외에 누가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성경에서 일관되게 ‘이 창조자만이 나의 구원자’라는 믿음을 요구한다. 전능한 분 외에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각 개인의 삶뿐 아니라 모든 만물의 역사는 단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첫 절인 창세기 1장 1절은 이때부터 겪게 되는 시간-공간-물질 속의 그 유일한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란 거짓말 할 줄 모르는 분, 할 필요도 없는 분(벧전 2:22), 그리고 전능하신 분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뿐인 역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의 믿음은 그 뒤에 이어지는 창조역사와 그 이후의 기록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1장 1절은 믿지만 다음 내용 중에는 그대로 믿지 않는 것도 있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1장 1절에 대한 바른 의미를 모르는 데서 나온 자세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와 닿지 않거나, 창조자를 배제하고 자기 혼자 깨달아 알려는 사람들이 한 말에 더 신뢰를 두었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간단한 것부터 복잡한 생물들이 수십억 년 동안 진화와 멸종이 반복되었다는 진화역사가 그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다.
성경은 이 세 차원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 세 가지를 초월하신 하나님과 이 세 가지 안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형상인 인간과 주고받는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그 창조 주간을 보며 그 분의 사랑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