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통한 복음8 태초에 계셨던 말씀
이재만, ACT뉴스 2013년 6월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엇으로 창조하셨나요?”
“말씀이요!”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
성경의 어느 곳보다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모습은 창조 장면이 기록된 창세기 1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등장한다. 창조하실 때마다 반복해서 “말씀하시되(이르시되)”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만 11번 등장한다.
그런데 “말씀”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1장 14절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으로 보아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장 3절에는 “만물이 그(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예수님) 없이 된 것이 없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창조자이심을 분명히 했다. 골로새서도 예수님을 창조자로서 “만물이 예수님에게서(by Him)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by Him) 그를 위하여(for Him) 창조되었다”(1:16)로 표현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창조자라는 것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바이다.
이때 창세기 1장의 “말씀하시되”로 창조하시는 장면을 보며 말씀이신 예수님이 그려지지 않는가? 첫 절에서 시간과 공간과 지구를 창조하실 때 성부 하나님, 다음 절에서 수면에 운행하시는 성령 하나님, 빛을 창조할 때부터 말씀으로 등장하는 성자 하나님. 즉 창조 시작부터 삼위이신 하나님 모두가 등장하는 듯하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 과정을 아들과 함께 행하신 것을 보여준다. 히브리서에서는 그 모습을 “그 아들로 말미암아(through Him: 아들을 통해서)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세분 하나님께서 함께 창조하시는 장면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하시며, 내(I)가 아닌 “우리(we)”라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에서도 뒷받침된다.
사람도 말을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며,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돋보이는 차이점 중에 하나다. 특히 인간이 구사하는 문법구조는 어떤 동물에서도 그 유사성을 찾지 못한다. 진화론적 사고를 갖고 언어의 기원을 연구하려는 자세는 번번이 실패해 왔다. 실제로 언어를 보면 진화론적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언어학자들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문법구조가 점점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해진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는 문헌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언어가 변해가는 과정을 보더라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과거 문헌들은 현재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보다 훨씬 복잡한 문법을 구사한다. 또한 이 시대의 언어의 변화를 보아도 문법적 구조는 점점 파괴되고 있다. 즉 이런 현상을 토대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복잡한 문법을 갖춘 더욱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언어가 점점 더 복잡해야 된다는 진화론적 사고와는 상반된다.
한편 이런 언어 변화는 성경적 기원과는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처음부터 완벽하게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와를 만났을 처음부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라고 완벽한 문법과 단어를 구사했다. 그리고 범죄 이후에 언어의 근본이신 하나님과 떨어지면서 언어까지 점점 어눌해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부르신다(call)”라는 구절이 여러 번 등장한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이름을 스스로 짓고 계시는 것이다. 빛, 어둠, 궁창(하늘), 땅, 바다 등을 창조하실 때 각각의 이름을 부르셨다(call). 이런 유사한 모습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자신이 하던 일들을 아담에게 맡기시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call)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call)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name)을 주니라”(창 2:19,20).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이름 짓는 모습을 통해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인정하시고 확인하시는 장면 같지 않은가? 실제로 언제나 우리는 이름 짓기에 빠르다. 어떤 것을 발견만 해도 이름을 바로 짓는다. 이는 어떤 다른 존재도 갖고 있지 못한 신기한 버릇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인류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형상인 사람에게 맡기셨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하나님과 우리의 역사를 잊어버릴 즈음에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말씀을 맡기셨다(롬 3:2). 그 이후 모세를 포함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으로 계시하시고 기록하게 하셨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들이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여러 번 언급된다(마 1:22; 4:14; 8:17; 12:17; 13:35; 21:4; 27:9; 눅 1:70; 행 13:29; 15:15).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인 선지자에게 맡기신 것이다.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태초부터 있던 이 생명의 말씀(요일 1:1)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까지 더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계 22:18,19). 사도 바울도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넘어갈 때 이를 교만이라고 했다.
큰 그림에서 성경을 보면 말씀에 대하여 창세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성을 갖고 유지된다. 말씀이신 창조주 예수님, 그 말씀의 형상이기에 창조되자마자 말했던 인간,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노아가족,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된 바벨탑 사건, 이후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그 가운데 말씀을 받은 선지자들, 말씀대로 오신 예수님, 말씀을 전하는 초대교회, 그리고 선교사들…
수십억 년 동안 진화와 멸종이 반복되며 인류까지 이르렀다는 진화론은 말씀이신 하나님뿐 아니라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이 말씀의 역사도 부정한다. 우리는 진화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진리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부탁 받은 자라는 사실(고후 5:19) 때문에 감격할 수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주를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다(빌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