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통한 복음7 노아의 때와 예수님의 때
이재만, ACT뉴스 2013년 5월
창조이래 태어났던 온 인류는 모두가 아담의 후손이다. 반면에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이긴 하지만 특별히 노아의 직계 후손이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노아가족 8명을 제외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특히 자기 자신이 노아의 직계 후손이란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 기록된 홍수가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실제 심판 사건인지 아닌지를 자신 스스로 점검하는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홍수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상황을 서로 비교하는 예로 사용된다. 이는 홍수심판이 사실임을 통해, 재림 때의 심판도 앞으로 일어날 역사적 사실임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홍수심판 이전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 3:5,6). 즉 홍수 당시 살았던 자들의 멸망 이유는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한 것이라 했다. 그들은 명백한 창조의 증거를 보고도 의지적으로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초림)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창조뿐 아니라 추가된 두 개의 믿음을 더 요구한다. 예수님의 재림과 홍수심판 사건이다. 아울러 이 둘을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 받을 것도 함께 언급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1)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2)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즉 첫째로 미래에 대한 믿음 즉 예수님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며, 둘째로 과거에 대한 믿음인데, 이어진 6절에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후자는 홍수심판 사건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 홍수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물(world)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와 같이 (변화 없이) 그대로 있다고 여기는 자’들로 표현했을까? 이는 성경은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대로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상은 창조 후에 타락과 홍수심판의 연이은 결과로 변형된 처음의 좋았던 모습을 상당부분 잃어버린 상태라고 말한다. 특별히 홍수심판은 ‘모든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로 시작해서 ‘천하의 높은 산이 잠기게 했고’, 추위와 더위를 등장시켜, 홍수 이전의 모습을 변형시켰던 전 지구적인 중대 사건이다. 즉 사도 베드로는 이 홍수가 처음 창조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했던 사건이라는 것뿐 아니라, 이를 믿는 믿음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것을 믿는 자들은 세상의 조롱도 받을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홍수 이전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 받았으며,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홍수심판을 믿어야 하며, 이 믿음 때문에 조롱 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는데 홍수심판이 그 예로 사용되는 이유에 대하여 베드로후서의 다음 구절에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즉 홍수 이후 남겨진 지금의 하늘과 땅은 홍수심판과 동일한 말씀으로 앞으로 받게 될 불심판 때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그 공통점이란 둘 다 심판이다. 하나는 과거에 있었던 물심판, 다른 하나는 미래에 올 불심판.
단지 사도 베드로뿐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홍수심판에 대하여, 자신이 다시 오실 때가 홍수 직전과 같다고 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예수님께서는 홍수 직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오실 때도 이와 같다고 하시며, 홍수심판을 통해서 앞으로 오게 될 상태를 설명하셨다.
홍수심판에 대한 성경 그대로를 믿는 확신은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수의 확신을 통해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면 처음 좋았던 창조 모습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는 귀중한 다리가 된다. 참 흥미로운 것은 홍수의 기록과 증거들을 통해 전 지구적 대격변을 알게 될 때 거짓 역사인 진화론을 벗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세미나를 인도할 때면 항상 겪는 일이다(홍수의 증거에 대하여는 창조과학의 글과 도서를 통해 접할 수 있음). 서로가 독립된 주제인 것 같은데, 홍수심판을 이해하면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짜 역사를 이해하면 가짜인 진화역사가 왜 틀렸는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을 바꾸어보면 진화역사를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전 지구적 격변인 홍수심판 사건을 믿는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행동은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창조와 홍수사건을 믿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후서의 ‘조롱’이란 단어는 이 시대에도 놀랍도록 적절한 사용이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부터가 아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으로 끝난 것도 아니다. 복음은 창조-현재-미래의 전시공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과 우리 사이의 실제 일어났던, 지금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사실이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엠마오 마을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1:27). 여기서 ‘모든’이란 단어에 모세가 쓴 창세기는 제외되는 것일까? 예수님의 초림뿐 아니라 재림도 담고 있는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등의 선지서는?
과연 창세기에 확신을 갖지 않는다면, 다시 오실 심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막연한 것이 아닌 분명한 시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이 시작에 대한 믿음은 창조자를 인정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로 인한 죽음과 죄악이 가득 찼을 때 일어났던 심판은 앞으로 창조자가 행할 일들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