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대홍수와 언약
Jonathan Sarfati 글, 이종헌 역, Creation ex nihilo, Vol. 38(2016), No. 4, pp. 44-45
대홍수가 끝난 후에, 노아와 방주에 탔던 모든 사람들과 동물 승객들이 배에서 내렸다. 그때 하나님은 노아의 언약(Noahic covenant)을 주셨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사에 적혀있듯이,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 및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와 맺은 그분의 언약에 대한 징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창세기 9:12-17)
어두운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현상인 무지개는 하늘에서 땅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지평선에 걸쳐 있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대홍수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전우주적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비록 무지개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볼만한 광경이지만, 또 다른 전지구적인 홍수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가 갖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실 분은 그분 자신이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이전에 그분이 잊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그것은 무지개가 언약의 수혜자를 대신하여 그분이 다시 활동하시는, 즉 전지구적인 또 다른 홍수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징조임을 의미하는 관용구라는 것이다.
대홍수 이전에 무지개가 있었을까?
무지개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은 분명히 노아의 언약에서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무지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를 고려해 보면 이전에도 무지개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다음 단락에서 차례로 그것들을 언급할 것이다: 무지개의 과학, 대홍수 이전과 이후에 작동하는 자연법칙,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위 등.
무지개의 과학
무지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물리학의 결과이다. 빛이 어떤 각을 가지고 물질 내로 들어갈 때 빛은 (프리즘과 같이) 다소 천천히 이동하며, 파장이 다르면 다르게 휘어진다. 이런 효과를 분산(dispersion)이라고 한다. 색깔은 파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여러 가지 색깔의 띠로 보게 된다. 파장이 짧을수록(보라와 파랑) 더 많이 휘고, 파장이 길수록(빨강 혹은 주황) 더 적게 휜다. 위대한 창조과학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경은 유리 프리즘을 가지고 분산에 관한 실험을 했다. 그의 실험이 시사하는 바는 색깔은 빛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이다; 색깔을 가진 물체가 색깔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색깔을 가진 것이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분산은 연속적이다; 우리가 색깔의 띠를 보는 것은 우리의 색각(colour vision)의 설계 때문이다. 뉴턴은 음계의 일곱 개 음표를 본따서 무지개에 일곱 색깔을 지정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indigo), 보라, 그래서 니모닉(기억을 돕는) 두문자로 빨주노초파남보이다. 그러나 색깔의 이름과 숫자를 다르게 지정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나에게는 ‘남색(indigo)’이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파랑-초록(‘aqua(옥색)’ ‘cyan(청록)’ 혹은 ‘turquoise(청록색)’라고도 부른다)의 작은 띠가 보인다. 실제로 차이가 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색깔에 붙이는 이름 때문일 수 있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제안한다:
뉴턴의 연구를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그가 남색이라고 불렀던 색깔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파랑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가 파랑이라고 한 것을 우리는 파랑-초록 혹은 청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빗방울에서도 분산이 생길 수 있다. 여기서도 빛이 반사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태양과 빗방울 사이에 있는 경우에는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또한 반사는 순서가 바뀐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파장이 짧은) 보라색이 안쪽에 있고 (파장이 긴) 빨강색이 바깥쪽에 있는 이유를. 그리고 우리는 안개와 바다 물보라에서도 작은 무지개를 볼 수 있다.
자연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노아와 동물들을 보존하시는 데 있어서 자연적인 원인을 주로 사용하셨다. 예를 들면, 노아는 나무 방주를 지어야만 했으며; 대홍수의 원인과 물이 차오름 – 큰 깊음의 샘 더하기 40일 동안의 비; 그 물의 감소 – 바람, 대륙이 올라가고 해양분지가 가라앉음. 이는 대홍수 이전과 이후의 ‘자연법칙’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경의 문맥으로 볼 때 대홍수 이전에는 자연법칙이 매우 다르게 작동을 해서 빛의 분산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증거는 명백히 없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창조를 지탱하시는 그분의 통상적이고 반복적인 방법이며, 반면에 기적은 그분의 예외적인 수단이라는 것이 우리의 설명이다. 따라서 무지개가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려면,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분산을 막고 계신다고 추론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성경에는 조그만 증거도 들어있지 않다.
존재하던 현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칼빈은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창세기 9:13)에 관하여 이렇게 주석한다:
어떤 저명한 신학자는 이 구절에서, 대홍수 이전에는 무지개가 하나도 없었다고 부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천박한 해석이다. 모세는 그 구절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지개가 그때 만들어졌다고 강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무지개 위에 어떤 표시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징조를 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에 관하여 고찰하는 철학자들과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무지개의 색깔은 자연적 원인의 결과이지만,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에 대해 갖는 권리와 권위를 박탈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세속적으로 작용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물질이나 의식을 새로운 징조로 삼으신 다른 예가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최후의 만찬을 제정하셨다. 그분은 이제 이것이 그분의 몸과 피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부록)대홍수 이전에 비가 없었다?
창세기 2:5-6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안개가 온 지면을 적셨던 시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사람도 있기 전이었다(5절). 성경은 창조주간의 ‘비가 내리지 않았던’ 조건이 대홍수까지 16세기 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개념은 외면적 매력이 있다; 대홍수의 비가 새로운 것이라고 하면 노아의 경고를 거절한 것이 보다 더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로 무지개가 생기려면 비가 와야 하며 대홍수 때 무지개가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두 가지 논점 모두 꼭 그럴 필요가 없다. 본문을 보라). 지구의 모든 물이 있는 곳에서 진행하는 증발로 인하여 구름이 생기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