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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복음 선교에 진화론이 미치는 영향

The Impact of EVOLUTION on the Missionary Evangelization of CHINA

Russel Grigg , 이종헌 역, Creation ex nihilo, Vol. 34(2012), No. 3, pp. 44-46

 

 

중국에 상주한 첫 번째 기독교 선교사는 로버트 모리슨 스캇(Scot, Robert Morrison, 1782-1834)이었다. 그는 그 임무를 위해 준비하는 데 있어서 영국에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조직신학 및 의학을 공부했으며, 중국어를 배우고, 런던 선교사 협회에 참석했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네가 나와 같이 가도록 권유하고 싶다. 중국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 길이 없는 35천만 명의 영혼을 생각해 보라...”

 

그는 중국에서 중국어 문법을 썼으며(1812), 성경 전체를 중국어로 번역했고(1807-1819), 세권짜리 중국어-영어 사전을 편찬했는데(1815-1823), 이들 모두는 장래의 선교사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가치의 도움이 되었다.

 

그 다음 25년 기간에는 정치적 활동의 결과로 선교사들의 기회가 대단히 증가되었다. 첫 번째 아편 전쟁이 끝남에 따라 1842년 난징 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에게 영원히 양도되었으며, 상하이, 광동, Ningpo, Fuchow, Amoy 5개의 조약항구를 수립했는데 이는 서방 국가들로 하여금 거주와 무역의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1858년과 1860년에는 추가의 조약 항구와 개방도시들이 수립되었다. 이는 선교사들의 지위를 혁신시켜서 이제는 제국 내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며 각 성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자기들의 믿음을 전파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활동을 이들 개방된 항구로 제한하였다.

 

 

허드슨 테일러 다음 세대 개척자

 

다음 50년 내에 중국으로 갔던 영국, 미국 및 유럽의 많은 선교사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아마도 영국 요크셔 출신의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1832-1905)일 것이다.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중국인들에 대한 깊은 사색의 결과, 그는 중국 내지의 지방으로 선교사들을 보낼 목적으로 1865년에 중국내지선교회(CIM)를 창설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믿음의 원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는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공급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의 선교사들에게 기도만으로 하나님을 통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법을 배울 것을 촉구했다. 테일러는 그리스어, 히브리어 및 라틴어를 배웠으며, 나중에는 몇 가지 중국 방언으로 설교할 수 있었다. 초기의 CIM 멤버로 24명의 선교사가 있었는데, 중국 내지의 선교사가 없는 11개 지방에 각각 2명씩의 일꾼과 몽골에 2명이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죽은 1905년까지는 그 숫자가 828명까지 되었다. 루스 터커는 그녀가 쓴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19세기에는 사도 바울 이래로 허드슨 테일러보다 더 넓은 비전을 가지고 보다 더 체계적인 복음 전도 계획을 지리적으로 멀리까지 수행한 사람은 없었다.”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에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99-1901의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 때 거의 2,000명의 중국 기독교인과 186명의 선교사(아내와 아이들을 포함하여)가 학살당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다른 어떤 나라에서 겪었던 것보다 가장 극심했던 박해 가운데, 중국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의 수난은 중국의 기독교 세계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복음주의자들은 학살의 희생에 고무되어서 위대한 사명에 복종하기와 전 세계 인구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고 가리라는 데에 도전받는 사람의 수가 많게 나타났다.

 

 

복음 선교의 10

 

의화단 사건이 진압됨에 따라, 중국의 선교 사역에 예외적인 기회가 동텄다. 여기에는 여러 나라의 여러 분파에서 많은 선교사와 선교단체가 동참하였으며, 선교사들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복음전파에 더 많이 활약했다. 또한 자라나는 중국 교회를 교육, 의학 및 기독교 문학 프로그램으로 양육할 뿐만 아니라, 아편 및 여인들의 전족 등과 싸우며, 고아원을 열기도 하고 맹인, 귀머거리, 벙어리 등을 위한 학교를 열기도 했다.

 

교회 역사가 K. S. Latourette 교수에 따르면, 중국 선교사의 숫자는 18891,296명에서 1905년에는 3,445, 1915년에는 5,462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914년까지 모든 주요 도시 및 보다 작은 많은 도시에서 실질적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화론의 충격

 

1차세계대전 이후,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여기에는 1차세계대전이 세계 경제와 서구인들의 지위에 미친 해로운 영향, 중국 민족주의의 등장 뿐 아니라, 노상강도, 회의론 및 불가지론 의 확산, 존 듀이와 버트란드 러셀 등과 같은 인본주의자들이 방문함으로써 진화론 철학이 번지고,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다는 배경 하에” 1922년에 설립된 중국 빈기독교 연맹 등이 있으며, 기독교는 숨겨진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본국에서도 처음으로 자원자와 자금이 줄어들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기독교 선교는 본국 차원에서 가장 혼란스런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대한 움직임이 시작된 이래 125년 만에 그들에게 닥친 것이었고, 중국에서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비록 선교사의 수는 1918년의 6,395년에서 1925년의 8,158명으로 증가하였지만, 이 증가율은 1904년에서 1914년의 증가율에 비하면 반 정도밖에 안된다. Latourette 교수에 따르면, 여기에 기여한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본국에서 진화론적인 자연주의 및 그와 같은 부류와 자유신학이 일어난 때문이다.

 

Latourette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는 복음의 타당성 및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수성에 관한 확증의 손실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그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새로운 지식의 광대한 홍수와 화해시키고 있는 중이다. ... 기독교는 진리인가? 우주로부터 하나님을 몰아낸 지질학, 진화론적 가정, 사회학 및 심리학은 종교를 단지 원시적인 귀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만들어버렸나? 성경은 초기에 빨리 믿어버리는 시대의 잘못된 생산물이고, 기독교의 윤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가? 몇몇 사람은 솔직히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었으며 초기에 가졌던 확신을 고수하려고 하면서도 열정이 없어져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믿음에 대한 진술을 다시 짜면서 새로운 발견과 일치하도록 했는데 그런 과정 중에 종종 역사적 교의에서 아주 멀리 벗어났다. 기타 근본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시도를 파괴적인 모더니즘이라고 낙인찍고, 성경은 오류가 없으며, 이전의 교의들이 최종적인 것이며,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는 과학적 발견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했다.”

 

위기는 심각했다. 진화론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개척선교사들이 하나님께 영감 받은 명령이자 열정이었던, 구세주가 필요한 잃어버렸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성을 손상시켰다. 한가지 중요한 요인은 예수님이 우리의 친족(기업무를 자)구속자”(이사야 59:20)이라는 것인데, 친족-구속자는 그가 구속하는 사람과 혈연관계에 있어야만 한다(레위기 25:47-49, 룻기 3-4). 이것은 오직 우리가 한 사람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가능하다(사도행전 17:26). 그는 첫 번째 사람 아담”(고린도전서 15:45)이며, 그는 또한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인 예수님의 조상이기도 하다(누가복음 3:38). 진화론은 역사적인 아담을 부정하는데, 그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와 혈연관계에 있으므로, 결국 모든 선교 활동의 버팀목이 되는 결정적인 친족-구속자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역사적 전망

 

1920년대에는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어서 아직 현대의 반 진화론 운동이나 초기의 창조론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진화론 믿음에 의해서 창조에 대한 확증과 자유주의 신학의 자멸에 대항하는 자세가 불타올랐다. 훗날 (그 당시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 목사에서 추방당했던 Josef Ton에 의한 증언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서구 유럽의 기독교를 파괴시킨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나는 진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 신학이다. ... 자유주의 신학은 진화를 성경과 우리의 믿음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1920년대에 진화론이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나중에 종교이라고 말했던 철저한 진화론 물질주의자 모택동 주석의 지휘 하에 있었던 문화 혁명’(1966-1976) 때에 극심한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교회는 살아남았다. 현재 기독교인의 숫자는 다소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7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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