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15)다섯째 날 새의 창조
이재만, ACT뉴스 2014년 2월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1)
20, 21절에서 새(fowl, KJV)는 모든 나는 동물을 지칭한다. 즉 새, 곤충, 박쥐(포유류) 등이 포함된다.
새들은 알을 낳는다. 그런데 이 알이 정말 놀랍다. 알은 살아있기 때문에 숨을 쉰다. 그래서 달걀 껍질을 현미경으로 보면 수천 개의 구멍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구멍은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쉴 수 있는 완벽한 크기이다. 그뿐 아니라 내막, 외막, 공기 주머니, 흰자와 노른자… 이 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병아리로 부화될 수 없다. 과연 이 경이적인 달걀을 닭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닭을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인가? 만약 전자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이 달걀을 자연주의 속에서 설명하려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본 것만 가지고 설명하려는 것이 자연주의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능하다는 의미를 어려운 수학시험이나 컴퓨터 조립에 만점을 받은 사람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능하다는 것은 못하는 것이 전혀 없는 분에게 붙이는 칭호다. 닭이 먼저일까? 아니면 달걀이 먼저일까? 이 질문은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대답할 수 없다. 닭이 없는데 어떻게 달걀이, 달걀이 없는데 어떻게 닭이, 그러면 닭은, 달걀은… 끝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주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너무 쉽다. 달걀 낳는 닭이 먼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처음은 달랐다. 우리에게는 처음이 너무 선명하다. 전능하신 분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선명한 시작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처음은 달랐고, 이렇게 다른 처음을 자연주의적 사고로 알려고 하면 알 수도 없거니와 전혀 엉뚱한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처음부터 좋았다. 처음부터 동물들은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처음부터 해 달 별은 완벽한 위치에 창조되었다. 첫 남자는 흙으로 창조되었고, 처음부터 말할 줄 알았다. 첫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되었다… 이런 모습들을 어떻게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역사과학을 하면서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과거를 알려고 하는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증인을 배제한 나 홀로 탐정의 탐정소설과도 같은 것이다.
바닷새 중에 어떤 바닷새는 바위 위에 알을 낳는데 이 알은 절대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 이 알은 끝이 뾰족하기 때문에 언제나 작은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만 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추형 곡선의 방정식을 알고 계신 분의 지혜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박쥐는 자기가 입으로 내는 초음파가 물체에 반사되어 오는 소리를 레이더와 같은 모양의 귀로 잡아 물체를 식별한다. 과학자들이 깜깜한 방에 타이어를 채워놓고 6시간 동안 비행을 시켰지만 한 번도 부딪히지 않았다. 이 기술을 익히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또 그 기술을 자식에게도 가르쳐야 했을 텐데…
벌집은 육각형으로 이루어져있다. 최소한의 부피와 질량으로 가장 견고하게 지을 수 있는 구조가 바로 육각 기둥이다. 벌들이 삼각형이나 사각형으로 짓다가 육각형으로 바꾸었을까? 그렇다면 그런 모양으로 집을 짓는 벌들이 어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벌들은 하나같이 육각형으로만 집을 짓는단 말인가? 기하학을 완벽하게 아시는 분의 지혜다.
벌새는 1초에 80번의 날개 짓을 한다. 어떤 딱따구리는 총알과도 같이 1분에 수천 번 나무를 쪼아댄다. 독수리는 찰라 같은 수십 분의 1초 만에 물고기를 낚아챈다. 서부 농병아리는 헤엄을 치지 않고 날개를 치면서 물 위를 뛰어다닌다. 키위는 자기 몸의 반 만한 알을 낳는다…. 새들의 놀라운 생태 역시 끝이 없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질문을 들어보라. 감히 누가 이렇게 자신 있게 질문하실까? 이분께서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욥 39:26)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욥 39:27)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 38:41)
진화론자들은 타조를 보고 예전에는 날았었는데 뚱뚱해져서 날지 못하게 됐다고 하기도 하고, 하지만 앞으로 살을 빼면 언젠가 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역시 자연주의적인 해석이다. 분명하게 새를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날지 못하는 타조를 보며 타조는 예전에 날았든지 아니면 앞으로 날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진화론적인 발상인 것이다. 이제 깨달아 알려고 하지 말고 타조를 지은 분의 말씀을 들어보라. (욥 39:13-18)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타조는 결코 날지 못한다는 말씀.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타조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아느냐는 질문.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하나님 자신이 타조를 그렇게 어리석게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답변.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타조는 날도록 지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뛰도록 지었다는 결론!
이 이상의 답이 어디 있을까? 분명히 이분만이 타조의 창조자시다. 우리는 완벽한 새들을 보며 시공간을 초월하신 그분의 전능하심만을 인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