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기적에 대한 비판
(발표 : 서종학, 정리 : 이종헌)
2.1 신앙에 대한 증거로서의 기적
•철학의 역사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동행하셨는데,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 후손들도 그 죄성을 이어받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리게 되며, 바벨탑 사건 이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떠났다. 노아의 홍수 이후 인류가 이 땅에 번성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이 있었던 자리가 마음속에 남아있었으므로 궁금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답도 없는 채 계속해서 질문을 하다가 철학이 나오게 되었다. 철학이 질문하는 것은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 세상이 있을까?”라는 것으로, 이것은 잃어버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노아의 자손들(셈, 함, 야벳)이 전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서 나름대로의 문화, 철학 등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가장 체계적인 것은 유럽철학으로, 그것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 철학을 이해해야 된다.
-그리스 철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한 가지가 합리주의(=이성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이다. 신비주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일단 인정하고 그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고, 이성주의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관찰되는 것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디오게네시스의 뒤를 이어 피타고라스학파로 내려가서 플라톤이 완성했고, 이성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성했다.
-중세 때, 신학이 그 당시의 철학(답이 없는 질문의 연속)을 받아들임으로써 철학이 지닌 똑같은 오류와 모순에 빠져들어 중세 신학의 결론은 무지로 끝나버린다. 마치, 바늘 끝에는 천사가 몇이나 서 있을 수 있는가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들에 빠져들게 되었다.
-신학에 대해서 실망하면서, 신학 속의 철학을 끄집어내려는 시도로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순수하게 이성으로 확인되는 것만으로, 즉 자연주의적 세계관(자연 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것만 인정)을 성립시켰다.
-그 당시에 스피노자가 나타나 신학을 잘 전달하려고 했는데, 이성주의적 자연주의적 세계관만으로 성경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도 ‘이성’을 이용해서 신적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다가 아예 증명 자체가 필요 없다는 수동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1650년 이전의 기독교 신앙
-신앙과 이성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즉, 이성이 신앙에 대한 증거를 제공할 수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존 칼빈 : 이성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확립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1650년에서 1850년 사이 : 스피노자 →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인 기초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즉, 합리적인 증거가 기독교 신앙을 지지할 수 있다는 개념이 버려졌다.
-슐라이어마허의 논문 [기독 신앙론]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나 필요성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전적으로 포기한다.” → (이성으로는 안된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인 지지 같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그 이후로 합리적인 논증은 기독교 신앙을 지지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성과 신앙이 별개로 간다.)
•스피노자에서 슐라이어마허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주장
-스피노자 : 기적을 무지의 피난처라고 부르면서 기적을 거부했다.
-이신론자들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이후 자연법칙이 사물을 지배한다. 신은 떠났다. → 기적은 자연 법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기적을 거부하게 되었다.
-레싱 : 역사의 우연적 사실들에서는 영원한 종교적 진리들이 도출될 수 없다.
-흄 : 우주가 설계되었다는 개념을 부정
-칸트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규정적 관념으로 바꾼 후 그 관념이 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함
-슐라이어마허 : 어떤 증거가 기독교 신앙을 지지할 수 있다는 개념을 거부함. (그 당시에는 신학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맞서 싸울 지식이 부족해서, 철학에 동화되어 자연주의화된 기독교로 전락되었다.)
⇒신앙과 증거에 대한 생각의 변화 : ‘증거’가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증거가 없는 신앙이 더 낫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 기적에 대한 자연주의적 비판 때문에
•기적에 대한 자연주의적 비판
-스피노자와 슐라이어마허가 주장
-기적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비판의 결론은 ‘기적은 부조리(앞뒤가 맞지 않는 것)하다’는 것이다. 일단 기적이 부조리한 것으로 거부된다면, 기적이 지니는 증거로서의 가치는 소멸된다. → 그것은 그들이 가진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따른 분석, 즉 논리적인 결론일 뿐이지, 실제로 우주와 지구상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그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더욱이 그 이전에는 기적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신다는 것에 대한 최상의 직접적인 증거가 되었기 때문에, 기적을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지지하는 모든 증거를 거부하는 것이 되었다. → 특히 하나님이 설계하는 지성으로서 활동하실 수 있다는 개념이 사라졌다.
-스피노자와 슐라이어마허는 기적을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비자연주의적 활동 방식을 철저히 제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설계 또한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했던 기적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비판은 틀린 것이다.
-어떻게 처음에 스피노자가 기적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비판을 발전시켰으며, 또한 슐라이어마허가 기독교 신학을 재건할 때 어떻게 그것이 흡수되었는가? 슐라이어마허는 언제나 자신을 기독교 신학자라 생각했지만, 그의 기독교는 하나님이 설계하는 지성으로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지지해 주는 증거들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자연주의화된 기독교였다.
2.2 기적을 거부한 스피노자
•시대적 배경
-이 당시(1600년대 이후에서 1800년대까지)에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서 꼭 자연 상태에서 어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차원을 이해할 때,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닌 더 높은 차원에서 어떤 원인을 공급하게 되면 이 지상에서는 원인이 없는 결과가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 당시엔 아마도 예수님이 어린 아이의 음식을 가져다 나눠주니까 사람들이 숨겨놓았던 음식을 다 꺼냄으로써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부분을 인정할 때 그냥 공급되었다고 설명하면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었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1670년 출판한 [신학정치론]에서, “만일 종교가 어떤 식으로든 선한 일을 하려 한다면, 먼저 철학에 의해서 정화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미신의 영역 속에서 끝없이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기적에 대한 비판. 성경에 대한 공격. 성찬식과 미신을 동일시.
•기적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
(1)인식론적 비판 : 한계를 가진 인간이 기적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빈틈의 하나님(god of the gaps) : ‘설령 기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 자연적인 인과관계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인가?’ → 그 사건이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배제시킬 수 없다는 주장.
-우리가 기적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기적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는 열어 둔다.
(2)자연주의적 비판 : 기적은 자기 모순적인 부조리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주장 : “자연법칙에 반하는 하나님의 행동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행동과 동일한 것이다.” → 하나님은 가장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반해서 행동한다는 것(기적)은 부조리한 것이 되고 따라서 이런 가능성은 배제되어야만 한다.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적 비판에 대한 비판
-‘자연법칙’과 ‘하나님의 본성’을 동일시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것인가?
-스피노자는 일원론자였다. 일원론적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과 자연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일원론 안에서는 자연법칙과 하나님의 본성이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피조세계(자연)는 피조세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대로 존재하신다.
2.3 스피노자에 동화된 슐라이어마허
•시대적 배경
-슐라이어마허도 ‘자연법칙’과 ‘하나님의 본성’을 동일시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스피노자를 적으로 간주했던 전통적인 기독교 진영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스피노자보다 더 많은 설명을 해야 했다.
-[기독신앙론]에서 그는 기적에 대한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적 비판을 훨씬 더 엄밀하게 제시하고, ‘자연법칙’과 ‘하나님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스피노자의 관점이 정당하다는 것을 논증했다.
-스피노자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스피노자를 큰 소리로 비난할 수 없었고, 슐라이어마허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스피노자를 칭송하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기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정의
-자신이 기적을 경멸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던 스피노자와는 달리,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이 ‘자연의 체계’라 부른 것 안에서 기적을 위한 여지를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결국 기적에 대한 여지를 남기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기독신앙론] 이전의 정의 : 기적 = ‘물리적인 영역에서 자연적인 방식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 → 기적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을 제시
-[기독신앙론]에서의 정의 : 절대적인 기적 = ‘자연의 상호 관련성을 확실히 중단시키는 것을 수반하는 사건’ → 기적에 대한 자연주의적 비판을 위한 무대를 준비
•기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 비판
-자연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보통의 경우 어떤 사건(event) E가 일어나면 그 사건 E를 설명하는 자연적인 원인(cause) C가 항상 존재한다. → C와 E의 자연적인 인과관계 : C가 E를 일으킨다.
-자연에서의 인과적인 상호 관련성을 중단시킨다는 의미에서 어떤 사건 M이 기적(miracle)이 된다는 것의 의미 - M은 ‘C가 M을 일으킨다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원인 C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전칭부정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기적이 성립하는 조건
1)모든 자연적인 원인 X에 대해, X가 M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
2)C가 일어났다. C는 W를 일으킨다. M은 W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M이 W 대신에 일어났다.
-절대적인 기적은 1)과 2)를 만족시키는 사건 M이다.
-인과적인 형태 2)를 논리적 형태로 다시 쓰면
2‘)C가 있다. C는 W를 수반한다. M과 W는 동시에 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M이 있다. → M이 있다. 그러나 M과 W는 동시에 참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M은 not-W이다. C는 W를 수반하므로 대우 명제에 의해 not-W는 not-C이다. 그러나 C가 있다. 모순이다. → 이것은 기적이라는 개념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 비판의 결론 = 기적은 부조리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제거될 필요가 있다.
2.4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인 비판 분석
•그 시대의 과학은?
-슐라이어마허의 [기독 신앙론](1820년대) 이전에, 근대과학 발생 -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슐라이어마허는 인과관계와 수반관계를 동일시(일원론자) 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과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뉴턴과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자연적인 원인과 논리적인 필연성을 융합시키려는 슐라이어마허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뉴턴의 말,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 → 궁극적인 설명은 과학의 영역 밖에 있어야만 한다.
-뉴턴과 그의 제자들은 이처럼 과학에 대해서 최소주의적인(minimalist) 관점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적은 자연 안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제대로 된 개념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기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 비판
-인식론적 비판은 기적의 개념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기적의 개념을 폐지시키는 데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인식론적 비판이 안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아는 능력 또는 알지 못하는 무능력이 결코 실재의 사물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실재와, 실재를 아는 우리의 능력은 언제나 별개의 문제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 비판은 기적의 개념을 폐기시키려고 시도했다.
-사건 M이 기적인지를 묻는 것은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적법하지 못한 것이다. 기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기적은 내적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기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인 비판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2.5 자연주의적인 비판에 대한 비판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 비판을 적절하게 비판하려면
-스피노자와 슐라이어마허의 비판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 : 인과율을 논리적인 필연(또는 우리가 앞에서 수반이라 부른 것)과 동일시하는 것 → 단순하게 이것을 지적하는 것은 기적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비판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과율을 논리적인 필연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문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포함될 수 없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곳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신학을 지닌 철저한 신학적 결정론자들이었다.
-기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인 비판을 적절하게 비판할 때의 문제는 단순히 인과율과 논리적인 필연이 혼합되어 왔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체적인 구상에 계속 포함시키면서도(하나님을 제거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인과율과 논리적인 필연이 혼합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엄격한 인과적인 결정론을 피하는 신학적인 결정론을 찾는 것이다.
•기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정의
-M이 기적이 되는 조건 두 가지
1)모든 자연적인 원인 X의 경우, X가 M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
2)자연적인 원인 C가 일어났다. C는 W를 일으킨다. M은 W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W 대신에 M이 일어났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여긴다면(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3)모든 Y(Y는 전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에 대해서, 하나님이 Y를 정하신다면 Y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인 비판 : 하나님은 자연의 체계 전체를 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어진 원인과 주어진 결과를 연결하는 모든 인과적인 단계를 정하셨다. → 그러므로 기적으로 여겨지는 모든 M에 대해 3)은 2)에서 C가 W를 일으킨다는 것과 C가 W를 수반한다는 것이 동일함을 보장해 준다. → 그러나 일단 이 등식이 만들어지면 2)는 내적인 모순을 갖게 되고, 기적이라는 개념도 부조리한 것이 된다.
-이 논증 과정에 들어있는 논리는 그 자체로 유효하며, 나무랄 데 없다.
-문제가 된다면, 이 논증이 가지고 있는 전제가 문제가 되어야만 한다.
•기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정의에서 문제가 되는 전제
-문제가 되는 전제 = 슐라이어마허가 자연의 체계라 부른 것을 하나님이 정하셨어야만 한다는 전제
-자연의 체계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세상은 자연적인 원인으로만 충족된 체계라는 전제가 들어 있다. →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의 체계는 처음부터 자연주의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체계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슐라이어마허가 실제 세상과 대치해 버린 형이상학적인 가설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슐라이어마허의 의미에서의 자연의 체계가 되도록 정하셨을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자연의 체계가 되도록 결정하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것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제한한다는 데에 있다.
•기도에 대한 응답
-기도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견해 : 슐라이어마허는 ‘능력 있는 기도(efficacious prayer)-상황을 바꾸는 기도'로 알려진 것을 거부한다. → 능력 있는 기도를 무시하게 되면 운명론(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으셨으므로 우리가 발버둥쳐 봤자 소용이 없다), 혹은 결정론(자연법칙에 따라 가니까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대로 따라간다)으로 빠져들게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결정론자이기는 했지만, 운명론자는 아니었다.
-이중 기준은 없다. : “내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조건문을 거부했다. 그러나 반운명론자였던 슐라이어마허는 특히 그가 병들고 의사가 치료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의사에게 가지 않았다면 경과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형태의 조건문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앞의 조건문을 거부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Nature : DNA상에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해 놓으셨다.
+Nurture : 영양공급에 따라 nature가 바뀔 수 있다. 우리의 기도로 바뀔 수 있다.
•하나님의 결정의 범위
-슐라이어마허(및 스피노자)의 생각 = 자연적인 인과관계의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작동이 결정되는 자연의 체계를 결정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무조건적으로 결정하실 수도 있고(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큰 나라를 이루도록 하시겠다는 약속), 어떤 사건을 조건적으로 결정하실 수도 있다(예를 들면 율법을 지키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
1)하나님은 모든 사물이 자연의 체계 안에서 자연적인 인과관계의 보편적인 법칙을 따라서 작동하도록 결정하실 수도 있다.
2)아니면 하나님은 어떤 것들은 이런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하도록 결정하시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도록 결정하실 수도 있다.
3)아니면, 하나님은 보편적인 자연법칙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없도록 하시고, 그 대신 단지 개개의 사건들만을 직접 결정하실 수도 있다.
•결론
-17, 18세기의 신학은 그 때 당시의 과학, 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당시의 철학과 과학은 미숙했다. 그러므로 17,18세기의 신학도 미숙했다.
-피조세계 = 각각의 존재들이 다른 존재들과 상호 작용하는 고유의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실재의 상호관련된 집합
-하나님은 자유롭게 능력을 부여하시고, 특히 존재하고 있는 능력의 경우에는 그 능력을 자유롭게 폐지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존재의 고유의 능력을 무효로 하시고 그 존재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신다.
2.6 자연주의적인 비판의 중요성
•설계와 관련한 자연주의적 비판의 중요성
-그들의 비판의 유산은 진지한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표준적인 방법이 되어 왔다. 그 표준적인 방법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학문의 영역에 만연되어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따르면 진지한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은 문제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연주의적인 설명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 그렇게 해서 필연적으로 기적을 배제시킨다.
-그들의 비판은 기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려는 목적을 지닌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단지 자연을 자연적인 원인의 닫힌 체계로 이해했을 때에만 기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 하지만 우리는, 닫힌 우주론이 아니라 열린 우주론을 가져야 한다.
-과학의 세계가 되었든 종교의 세계가 되었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간섭하실 수 있는 세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theory of everything)'에 대한 과학자들의 탐구가 결국에는 실패할 운명임을 말해 준다.
•결론
-결과적으로,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설계하는 지성에 대해서 아무런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다.
-기적을 불가능한 것으로 배제시킬 수 있다면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기적에 대한 스피노자와 슐라이어마허의 자연주의적인 비판은 기적을 배제시키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지지를 받을 수 없고, 설계를 막는 데 적법하게 사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계에 대한 가능성은 다시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