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Homosexuality) 시리즈(5) 동성애-성경에서는 언급이 없을까?
이재만, ACT뉴스 2012년 9월
“정말 성경에 동성애에 대해 써 있어요?” 필자가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받았던 질문이다. 아마 그 유명한 십계명에도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당사자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과학자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세 가지를 돌아가면서 접근해본다. “과학적으로 맞는가(scientific)?” “그 결과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social)?”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biblical)?”이다. 이미 앞 칼럼에서 동성애자가 생물학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과 동성행위에서 파생된 심각한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문제점들을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알아볼 순서다.
성경전체가 말하는 바
그러나 성경은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아주 선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가장 분명한 곳은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일 것이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동성행위를 한 자는 ‘죽이라’고 하셨다. 즉 동성애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구분하신 것이다. 레위기의 다른 곳에서는 “가증한(detestable: 혐오할만한) 일”(18:22)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미 구약시대에서도 동성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며 실제로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 시대를 보면 엿볼 수 있다. 소돔사람들이 롯의 집에 온 천사들에게 “상관하리라”(5절)고 했는데, 이를 영어 성경에서는 “we can have sex with them(NIV)” “we may know them carnally(색정적으로) (NKIV)”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도시는 성적으로 문란했을 뿐 아니라 동성행위가 자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7)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직접 불로 형벌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자세는 구약과 차이점이 없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those practicing homosexuality)”(딤전 1:9,10). 개역개정 성경이 “남색하는 자”로 번역한 것을 영어 번역은 homosexuality로 분명하게 번역하고 있다. “미혹 받지 말라… 남색하는 자나(men who have sex with men)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 동성애를 하는 상황에서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에서는 구체적인 문장을 할애했다. “곧 그들의 여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느니라(received in themselves the due penalty for their perversion)”(롬 1:26,27). 동성행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순리적 행위에서 벗어나 역으로 행하는 것이며, 부끄러운 일이며 이에 대하여 보응도 이미 받았다고 했다.
동성애가 개인과 사회에 어떤 심각한 결과를 주었는지 이전 칼럼에서 이미 다루었다. 그런 면에서 로마서에서 ‘상당한 보응을 받았다’고 하는 이미 이루어진 과거형으로 쓰여진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동성애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신 극단적 조치는 그 목적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에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명령이며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
동성애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관계와 질서를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다. 그 가운데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과의 가장 첫 번째 관계임과 동시에 올바른 질서다. 이는 창조 때부터 드러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창조자의 형상이며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지어졌다. 예수님께서도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막 10:6)라고 하시면서 창조 사실을 그대로 인용하셨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는 타락한 후에 발생한 것도 아니요, 시간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죄짓기 이전에 그분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하시는 완전한 작품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첫 여자인 하와를 창조하시며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하시며, 시작부터 ‘한 몸’에 대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성애에 대한 시작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다. 동성애자의 리더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진화론적 사고로 동물에서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2012년 7월호 Creation Truth 참조: 실제로는 동물에서 동성애에 대한 어떤 증거도 없다). 이런 자세를 보더라도 이들에게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동성행위에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동물을 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그분의 형상이며, 동물은 우리가 다스릴 대상이라고 그 관계를 분명히 한다. 또한 성경은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이어진 ‘한 혈통’(행 17:28)이므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생육하라”(창 1:27).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첫 명령이다. 첫 명령이니만큼 그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해서 이 지상명령이 이루어지기를 계획하신 것이다. 한편 동성애는 이 명령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 어떤 경우도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관계를 통해서 다음 세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에 대항하는 중대한 죄인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이성부부와 동일하게 입양을 하기를 원한다. 애를 낳지 못하는 자신들도 이성부부와 같이 애를 키워보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동성부부에게 입양되는 숫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과연 인도적 차원으로 부모가 없는 이들을 받아주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다행한 일일까? 동성부부에게 입양된 이 아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것은 너무 자명한 것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남녀로만 ‘생육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도록 명령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남녀의 관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은 남녀라고 아무나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만 허락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동성애는 죄에 죄를 더한 심각한 행위로 간주하며, 하나님은 사형이라는 엄단의 조치를 내리신 것이다.
동성애도 결국 성경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만약 교회에서 동성애를 허용하거나 침묵의 자세를 취한다면, 이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읽을 때는 눈을 감겠다는 의미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교회는 그렇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앞서 과학적 내용을 다룰 때 성염색체에서 XXY 남성, XYY 남성, XXX 여성 등과 같은 잘못된 경우들이 생겨난 예들이 있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런 특이한 예들은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인한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들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죄짓기 이전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타락 후 변질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모습을 보고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계셨던 하나님을 통해서 거룩한 첫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즉 우리는 타락 후의 모습으로 타락 후의 환경에서 살지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함으로써만 그 첫 모습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미 타락된 잣대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자신 스스로는 무엇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동성행위의 당위성을 말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성애를 느낀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 것이다. 그러나 탐나는 물건을 보고 자연스럽게 탐욕을 느꼈다고 그 도벽을 그냥 놔둘 수 있을까? 포르노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묵과할 수 있을까? 마약을 보고 나도 모르게 마약을 하게 되었다고 이를 허용할 수 있을까? 동성애도 그 충동이 난다고 해서 그냥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를 짓게 하는 마음을 오히려 “다스리라”(창 4:7)고 하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타락한 이후의 세대는 본받는 대상이 아니라 분별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그 분별은 타락하기 이전에 창조 때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타락한 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서만 분별이 가능해 진다. 그런 면에서 앞선 칼럼이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인 면과 사회적 결과를 제시했을지라도, 이는 동성애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결국 동성애 문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적 답변이 가장 최종적인 기준이다. 그리고 성경은 동성애에 대하여 사형에 처할 만큼 단호히 금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