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 무엇이 문제인가?
서민호(한국창조과학회 이사, 계명대학교 교수)
1. ‘다빈치 코드 (댄 브라운 지음)’의 줄거리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사라’라는 딸을 낳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딸 사라는 프랑스 남부지방으로 옮겨가 살았다. 예수의 후손은 프랑스 메로빙 왕조를 이루었다. 이 모든 사실은 중세 때 탬플 기사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밀문서로 발견했다. 탬플 기사단은 비밀문서를 이용하여 교황청을 협박하여 엄청난 돈을 받아냈다. 교황은 프랑스 왕에게 명하여 탬플 기사단을 거의 다 암살했으나 비밀문서는 못 찾았다. 일부 살아남은 탬플 기사단의 후예가 ‘시온 수도회’를 조직했고 현재까지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은 모두 예수의 후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든 비밀을 그의 그림과 작품 속에 암호(code)로서 감추어 두었다. ‘오푸스 데이’라는 가톨릭 단체가 이러한 증거들을 없애고 예수의 후손을 죽이고 있다. 이 모든 내용은 역사를 기반으로 한 사실이다
예수는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어 예수를 신격화 시켰다. 복음서는 80개나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4복음서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금지했다. 예수는 자신의 후계자로 막달라 마리아를 세웠는데 남자들이 권력을 쥐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구원을 받는 길은 예수를 믿는 것만이 아니고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많은 구원의 길이 있다.
2. ‘다빈치 코드’의 허구성과 상업성
역사적 사실이 전혀 아니며, 완전히 날조된 역사 왜곡이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적 이단 종교 사상이다. 종교 다원주의-여권운동-성해방 시류를 이용하였으며, 사람들의 호기심 (궁금증과 재미)을 이용한 공상소설로서 5000만부나 판매된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이며 영화화되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를 자극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3. ‘다빈치코드’의 문제점
(1) 시온수도회
‘다빈치 코드’의 주장: 프랑스 왕 고드프루아가 1099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직후 성배 (聖杯, Holy grail)의 비밀과 상릴(Shangreal) 문서를 지키고자 창설하였다. 1795년 파리 국립도서협회는 양피지 기밀문서를 발견하였다.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시온수도회 회원이었다.
사실: 시온수도회는 1956년 프랑스사람 피에르 플랑타르드가 창설하였다. 플랑타르드는 위조 전문 범죄자였고 반 유대주의자였다. 플랑타르드는 가짜문서를 만든 후 몰래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넣어 두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조작하였다. 플랑타르드의 사기사건에 가담했던 공범들이 이러한 사실을 자백하였고 영국 BBC방송에서 사기극의 전모를 보도하였다.
(2) 탬플(Temple) 기사단
‘다빈치 코드’의 주장: 시온수도회가 만든 군사조직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배의 비밀이 기록된 상릴문서를 발견하였고, 이 문서를 이용하여 바티칸을 협박해서 엄청난 돈과 권력을 얻게 되었다. 교황 클레멘트 5세가 프랑스 왕 필립4세의 군대를 이용하여 탬플기사단을 제거하고 화형시켰으나 성배의 비밀문서는 받아내지 못했다.
사실: 탬플 기사단은 1118년에 휴 드 페인이라는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다. 기사단의 임무는 성지 순례를 가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안내하는 일이었다. 기사단은 성지순례자들의 헌금과 이를 이용한 은행업으로 큰돈을 벌게 되었다. 어떤 문서를 발견한 기록은 전혀 없다. 1291년 아크레에 있던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가 이슬람 군인들에게 함락되자 탬플기사단은 유럽으로 철수했다. 프랑스의 필립 왕은 탬플기사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교황에게 압력을 가하였고, 군대를 보내 탬플기사단을 기습하고 제거하였다. (교황은 오히려 탬플기사단과 관계를 좋게 하려고 노력했다)
(3) 오푸스 데이 (Opus Dei)
‘다빈치 코드’의 주장: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 집단으로서, 극단적 고행으로 충성을 다짐하는 가톨릭 집단이다.
사실: 1928년 스페인에서 창설됨. 대부분의 회원은 평범한 가정을 둔 일반인들이다. 3% 미만만 성직자들이다. 극단적 고행활동이나 충성 행동은 없다.
(4) 성경 형성과정
‘다빈치 코드’의 주장: 성경은 하늘에서 내려온 게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역과 추가, 개정을 통해 발전되어 온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오늘날의 성경을 만들었다.
사실: 성경은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1500년 이상에 걸쳐 기록되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역사이고, 어떤 부분은 개인서신, 회고, 비평, 전기, 자서전, 법률, 예언 등이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나 바티칸이나 초대 기독교인들과 아무 관계없이, 예수님 탄생하시기 수백 년 전인 기원전 4세기경 이미 완성되어 합본으로 만들어져 정경으로 확정되었다.(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인 70인역 성경이 대표적이다. 기원전 250년-150년 사이에 번역됨. 히브리어 원본에서 추가, 개정된 것이 아니고 단지 번역된 것이다.)
윌리엄 올브라이트: “신약성경의 그 어떤 책도 AD80년 보다 더 늦은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A.T. 로빈슨: “신약성경 전부가 AD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이 확실하다.”
신약성경은 예수님 생존 때부터 불과 40-50년 이내에 기록된 생생한 역사기록이다.
콘스탄티누스보다 150여 년 전의 기독교 지도자인 이레니우스의 책 ‘이단 반박’에 이미 4복음서만이 분명한 복음서이며 공식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F.F. 브루스: “AD180년경에 복음서가 4개라는 생각은 기독교계 전체에 너무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사실로 확립되어있었다.”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보다 수백 년 전에 신약성경은 정경으로 인정되고 사용되었던 것이다.
정경(Canon) 결정 기준:
1. 사도의 권위성: 바울, 베드로, 요한, 마태, 누가, 마가, 야고보, 바나바
2. 교리의 일치성, 구약 예언의 성취성:
3. 교회와 교부(church father)들의 공감성:
폴리캅(사도 요한의 제자, AD115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150년),
이레니우스(폴리캅의 제자, AD2세기 초)
(5) 니케아 종교회의
‘다빈치 코드’의 주장: 복음서는 80여개나 되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어 참가자들을 협박하여 현재의 4복음서만 채택하고 다른 복음서를 폐기했다.
회의 참가자들은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투표에 붙인 결과 간발의 차이로 4복음서가 겨우 통과되었다.
사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어느 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내용은 성자(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여호와 하나님)와 동등한가, 성부 보다 약간 낮은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타나시우스가 제안한 성부와 성자는 신성이 동일하다는 ‘삼위일체설’을 정설로 채택하였다. 투표에 붙인 결과 압도적인 찬성으로 (300:2) 통과되었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다빈치 코드’의 주장: 예수는 위대한 인간이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예수 자신은 자기를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어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성경은 모두 폐기시키고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성경만 인위적으로 채택하여 예수를 신격화, 우상화 시켰다.
사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신이었다. 예수 자신도 자기가 신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많은 기적과 부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믿었다.
그리고 4복음서는 니케아종교회의에서 채택된 게 아니며 콘스탄티누스 시대보다 수백 년 전부터 복음서는 오직 4복음서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4복음서는 예수의 신성만 강조한 성경이 아니고 예수의 인성 (배고픔, 피곤함, 슬픔, 화냄, 놀람, 유혹받음)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책은 4복음서 보다 오히려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더 강하다.
예를 들면,
(도마복음서 1장2-9절) 예수가 5살 때 다른 히브리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예수는 강둑에서 진흙을 한줌 떠내어 진흙으로 참새 열두 마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들이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가서 예수가 안식일에 진흙으로 참새를 만든다고 안식일을 모독하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자 요셉이 예수에게 가서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느냐?”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의 손바닥을 치더니 그 참새들을 불러 말하기를 “가거라. 멀리 날아가거라.”하고 말했다. 그러자 참새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멀리 날아갔다.
사실: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성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황당한 잠언집 같은 내용의 나열이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대부분이다.
(도마복음서)
예수가 말했다. “사자를 먹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는 사자가 사람이 됨이라. 사자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사자가 됨이니라.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어서 남자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닐 때, 그때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시체를 발견한 것이요,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보다 귀중한 사람이다.”
(빌립복음서)
겨울은 세계이며, 여름은 다른 세계이다. 겨울에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7) 영지주의(Gnosticism) 복음서
‘다빈치 코드’의 주장: 복음서는 4복음서 이외에도 진리복음서, 도마복음서, 빌립복음서, 이집트인들의 복음서, 마리아복음서, 유다복음서 등 80여개나 되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어 참가자들을 협박하여 현재의 4복음서만 채택하고 다른 복음서를 폐기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성경은 모두 폐기시키고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성경만 인위적으로 채택하여 예수를 신격화, 우상화 시켰다.
사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란 지식(Gnosis), 즉 영에 관한 지식을 숭상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믿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통한 ‘득도의 지식’, 즉 그노시스(gnosis)를 얻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중재나 교회의 간섭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적 자아를 발견한 한 가지 경우라고 믿었다. 예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다고 믿는 영지주의자들조차도 그것이 속죄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적 가능성을 깨우쳐주는 수단이었다고 믿는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예수는 로고스(이성, 특별한 지식)로서 우리에게 ‘그노시스’를 가져다주기 위해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모두다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바보들의 신앙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상징적으로 해석했으며 은유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영지주의는 기독교가 대중화 되자 기독교를 이용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플라톤적 사상을 전파하려는 이단들이었다. 영지주의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에 기초하지 않은 관념적 사상체계에 불과하며,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많은 문제를 일으킨 이단이다. 영지주의 문서들은 사변적 사상들로 꽉 차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적 사색만으로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사상이다. 영지주의는 예수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한다. 영지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사상’이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영지주의 복음서라는 것도 80여개가 아니고 6개 (진리복음서, 도마복음서, 빌립복음서, 이집트인들의 복음서, 마리아복음서, 유다복음서) 밖에 없다.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2세기-6세기 때 기록된 이단문서들이다.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기록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약성경의 4복음서들은 AD60년-95년 이전에 십자가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영지주의 복음서의 제목은 도마, 빌립, 맛디아, 유다, 마리아 등의 예수님의 제자들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제자들과는 전혀 관계없이 기록된 것이며 이름만 갔다 붙인 것이다.
오리겐 (2세기 초반 기독교 지도자): “나는 도마복음서, 맛디아 복음서를 비롯한 여러 복음서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우리는 오직 교회가 인정한 것만 인정해 왔으며, 교회는 오직 4복음서만 받아들여야 한다.”
도마 복음서, 빌립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같은 영지주의적 문서들은 이미 2세기 초대기독교인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문서들은 거짓 문서이며 이단문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교인들에게 이단문서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8)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설
‘다빈치 코드’의 주장: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당시 마리아는 예수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성배는 술잔이 아니고 예수의 피를 잉태한 막달라 마리아가 성배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 가서 이집트에서 예수의 딸 ‘사라’를 낳았으며, 그 후 이들은 배를 타고 프랑스 남부지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예수의 후손은 프랑스 메로빙 왕조를 이루었으며, 그 후손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삭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이 있다.
사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전혀 없다. 예수는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 듯이 오해되고 있는 영지주의 복음서에서조차도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빌립복음서 (3세기에 편집된 영지주의 문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동행자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리스도는 다른 제자들보다 그녀를 더욱 사랑했고 자주 그녀에게 키스했다. 다른 제자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고 반대를 표명했다. ‘어째서 저 여자를 우리들 보다 더 사랑하시나이까?’하고 그들은 예수께 말했다.
사실: ‘동행자’라는 단어는 아람어로 기록된 게 아니고 콥트어(고대 이집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뜻은 ‘동역자, 동료, 친구’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