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5) 빛
이재만, ACT뉴스 2013년 9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3,4)
‘빛’이란 무엇인가? 이는 과학자에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가 빛을 인식하지만 아직 누구도 빛을 정확히 정의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파동적 성질과 입자적 성질을 가졌다는 물리학적 표현을 한다. 아마도 이 이상의 표현을 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은 3900-7700Å(옹스트롬=10-8cm) 파장의 범위인데 그 파장의 단파부터 보남파초노주빨 무지개 색으로 나뉘어진다. 이 모든 파장의 가시광선이 한꺼번에 와 닿을 때 색감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백색광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가시광선의 영역을 벗어나면 사람은 그 빛을 감지할 수 없다. 이 보이지 않는 빛은 가시광선보다 짧은 파장의 자외선, X선, 감마선 등이며, 긴 파장으로는 적외선, 마이크로파, 전파 등에 해당한다. 이런 빛은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일상생활에서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는 있다.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바닷가에서 하루를 지낸 후에 그 피부의 그을린 차이를 보고 자외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병원에서 X-선 촬영을 하고 필름에 드러난 뼈들을 보며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긴 적외선은 열로서 다가오는데 화로에서 따뜻하게 느끼게 하는 복사 에너지가 바로 적외선이다. 열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열을 발하는 물체가 붉은색을 띠는 것은 가시광선의 가장 긴 파장인 붉은색과 적외선의 파장이 겹쳐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더 긴 파장을 통해 우리는 라디오를 수신할 수 있다.
그러면 빛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는 내리기 어렵지만 과학자들은 빛이 전자기적 “에너지”의 모든 영역이라는 점은 동의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빛은 가시광선뿐 아니라, 자외선, X선, 적외선, 전파를 포함하며, 더 나아가 열, 소리, 전기, 자기, 분자상호운동의 영역에까지 해당하는 포괄적인 에너지다. 그러므로 빛은 에너지의 가장 기본이며 전자기적인 모든 형태를 활성화 시키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빛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1절에 시간(태초)-공간(하늘)-물질(지구)라는 차원들을 창조하신 후에 이들을 활성화시킴과 동시에 에너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첫째 날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은 오늘날 과학으로 접근하더라도 손을 들 수밖에 없는 놀라운 과정이다.
가시광선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우리가 물체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 반사된 빛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란색 색종이를 보고 있다는 것은 그 색종이가 노란색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은 흡수하고 노란색의 파장만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가시광선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인간의 눈만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망원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렌즈 망원경이 어느 정도 고배율이 되면 상이 너무 어두워서 확인하는데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므로 천문학자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별들을 관찰할 때 이 한계를 알기 때문에 자외선, 적외선, 원적외선, 전파 망원경 등 다양한 우주망원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망원경이라고 할지라도 각기 장단점과 한계를 갖고 있다. 즉 이 광대한 우주를 보기에는 아무리 발달된 도구라도 아주 제한적이란 의미다.
이는 단지 멀리 있는 것을 관찰할 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아주 작은 것을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현미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렌즈현미경은 어느 정도 고배율이 되면 상이 너무 어두워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더 작은 물질의 확인을 위해서 전자현미경과 같은 특수한 현미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도구들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본 것만 믿는다는 말은 결코 바른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내가 본 것이 모두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다. 오히려 거꾸로다 믿음으로 본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란 말씀은 우리의 한계를 지적한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믿음은 바른 믿음을 의미한다. 즉 바른 믿음이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믿음이다. 성경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행하신 그 증거들이 보이는 것이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 시간-공간-물질 그리고 여기에 에너지화시키는 빛을 보며 성경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증거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도 ‘보신다’! 하필이면 이 빛을 창조하신 다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보이게 하는 매개체인 빛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신 것이다. 마치 우리는 보는 한계가 있지만 자신이 보는데 한계가 없다는 것을 비교하시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빛 때문에 보지만 하나님은 빛 때문에 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이 없어도 보는 분이다. 빛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빛은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우리에게 보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빛에 제한 받으실 리 없다.
그러므로 다윗이 찬양한 하나님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2).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움과 함께 그분에 대한 신뢰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