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통한 복음4 “보시기에 좋았더라(good)”와 “좋은(good) 소식”
이재만, ACT뉴스 2013년 2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씀이 “보시기에 좋았더라(good)”이다. 이런 ‘시작’은 다른 과거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묘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세상을 처음부터 좋게 창조하셨을까?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이런 시작만이 자신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은 좋은 분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단계가 필요 없이 처음부터 좋게 창조하실 수 있으셨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복음을 “Good News(좋은 소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좋은 소식이라고 할까? 처음부터 좋았는데 이제 와서 새삼 좋은 소식이 또 필요할까? 그럼, 창조와 지금 사이에 무슨 나쁜 소식(bad news)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 분명히 있었다. 바로 첫 아담과 하와의 범죄다. 그 범죄함으로 인해 죽음이 초래됐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오고, 홍수 심판 이후에 추위와 더위가 발생하고, 바벨탑 이후에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일련의 점점 나빠지는 사건을 겪은 것이다. 이 언어의 혼돈과 함께 각 민족들이 흩어지며, 또한 세대를 넘기며 정말 처음에 좋았었는지, 자신이 하나님 닮은 그분의 형상인지, 왜 이런 불편한 추위와 더위의 날씨를 겪고 있는지, 왜 다른 나라와 말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인지 모두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이 황폐된 상황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말이 맞는 말일 것이다.
다 잊어버린 각 나라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이 기록된 성경을 이스라엘(롬 3:2)에 맡기셨다. 이 이스라엘을 통해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길이 열렸으며, 이때부터 성경이 이스라엘을 떠나 각 나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살게 되었고 처음 좋았던 그 상황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 즉 Good News(좋은 소식)이다. 처음이 좋았고(good) 범죄함의 나쁜(bad) 일이 있었고, 다시 좋은(good) 상황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만을 복음이라 결코 말하지 않는다. 반드시 구약, 특별히 창세기로부터 시작된다. 아마 ‘복음은…’으로 시작되는 가장 분명한 구절은 로마서 1장일 것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2-4). 바울 사도는 복음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부터 시작하며 ‘성경’에 이미 약속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성경은 당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선지자란 우리가 소위 말하는 대선지서나 소선지서를 쓴 저자들만을 말하는 것일까? 신명기 마지막 장에는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 34:10)라고 하며 모세를 여호와와 대면했던 최고의 선지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죄로 인해 발생한 나쁜 소식이 기록된 책이 그가 쓴 창세기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성경을 복음서라고 부른다. 이 복음서도 결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인 구약 시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의 족보, 마가복음은 이사야서의 예언부터 시작한다. 누가복음은 3장에 예수님의 사역 이전에 아담을 넘어 하나님부터의 족보를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1장이 ‘태초’부터 시작하며 바로 예수님께서 창조자임 언급한다(요 1:3).
성경은 복음을 말할 때, 좋았지만(good)-나빠졌고(bad)-예수님을 통해 좋아진(good) 일련의 성경의 역사를 항상 함께 언급한다. 이 역사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 죄의 중대함,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신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우리의 참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는 것이야 말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문제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창조의 ‘좋았던(good)’ 것과 범죄로 인한 ‘나빠진(bad)’ 사실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가 진화와 멸종이 수십억 년 동안 반복되었었다는 진화론 교육 때문이라는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도 창세기 1장의 하루를 수십억 년으로 길게 늘여서 해석하곤 한다. 예를 들면, 1800년대 말에 유럽에서 등장한 유신론적 진화론, 1900년대 말에 북미에서 등장한 점진적 창조론, 2000년대 초에 한국에서 등장한 다중격변론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수십억 년의 진화과정을 성경과 타협하려고 시도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 진화, 멸종이 반복되었다고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즉 이런 타협 이론은 성경과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진화론이 들어왔을 때 창세기 1-11장을 하나의 비유와 시로 보려는 노력들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접근 역시 진화를 믿기 때문에 나온 자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가시덤불이 생기게 된 창세기 전반부에 기록된 사건들은 복음이라는 교리를 만들기 위해 누구의 의도로 지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산업혁명이나 2차 세계대전과 같이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다. 진화론을 받아들인 이론은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리지 못하게 한다. 더 나아가 죄로 인해 나빠진(bad) 상황을 불투명하게 한다. 이미 성경을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세속화된 이 시대에 복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Good News인 복음을 어떻게 사실적으로 전할까?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과제이다. 참으로 어렵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뿌리부터 회복시켜야 한다. 진화론이라는 가시를 제거하고 처음부터 계셨던 예수님을 창세기에 기록된 사실부터 확실히 전달해야 한다.